왜 사는가? 종교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왜 세상이 이렇게 괴로운가? 어떤 목표로 살아야 하는가? 내 성격의 결함은 왜 그러한가? 등에 대해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글입니다.
要訣
(상대방이 기대에 못미쳐도)
암만 화가 나도 남의 감정을 상하면 안되고 (함께) 일할 수 있는 base를(/餘地를) 해하면 안돼.(상대에 대해 암만 화가 나도 표면적으로는 기분 나쁘게 해서는 안돼.(/面前에서 기분 상하게 해서는 안돼.))
요는 모든 사람이 協助해서 일하는 것이 중요한데, (암만 상대방에게 화가 나도) 서로 같은 상태이고 같은 目標로 일한다는 것을 해하면 안돼.
肉身으로 되서 남과 분리되 (남을) 압박하면 남의 反撥을 가져온다. 生命을 잃는 것, 自己를 버리는 것이 +의 뜻일진대 그러면 안된다. (그것이 아니다.)
(남에게 대해,남앞에서) 肉身에 속하면 안된다.
<要訣 끝>
要訣
(남에게서) 肉身으로 오면 肉身으로 對應하게 된다. 그러면 나의 상태도 (前보다 더) 나빠진다.
남과 (자기 삶을 따라) 몸으로 分離하는 게 肉身이다.
또한 남앞에 (肉身으로)(나만 따로이) 남과 分離하면, 그 때부터 나는 世上에서 혼자가 되어 남과 競爭애서 이길 수 없고 지게 (敗하게) 된다.
+의 뜻은 우리가 生命을 잃는 것에 (自己를 버리는 것에) 뜻이 있다.
肉身을 버리고 客觀에 맞추는 것=+을 아는 것과 同一함
-->이것이 (우리에게) 永遠한 眞理(갈 길)이다
肉身에 屬하면 안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協助해서 일하도록[->모든 일의(世上의,우리 일의) 目標] 노력해야 된다. (個人의 限定된 能力으로는 救援을 얻을 수 없고(救援이 안되고)) 그래야 救援을 얻을 수 있다.
自己가 (마음이 아니라 (謙遜한 사람이 되어,謙遜하여)) 몸인줄 알면, 몸(안)에 (머물러)있으며 주위 모든 것(사람)이 잘되기를 바란다.(바랄 수 밖에 없다.) 자기는 그저 약한(一個) 몸이기 떄문이다.
또, 제 몸 안에 있을 때(조용히 칩거, 머물러), 이러한 때는 周圍 外部(사람)의 더러운 것이(마음이, 영향이) 내게 영향이 없다(영향을 안 미친다) <要訣 끝>
산다는 것 자체가 조그맣고 치사한(별거 아닌) 일이다. 그러니 삶이 (누구에게도) 별게 없다. 밖에서 (나가) 일하는 것도 별거 아닐 수 있으며 (*자신이*) 안살아도 그만이라고 (*自身속에서 生을 가볍게 함부러히*) (사람이)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사람에나 저 사람에나, 이런 경우에나 저런 경우에나 世上은 똑같다. 어떤 색깔로 맞이하느냐만 (단지) 그 差異이다 ...(未)
◎
+이 주신(/우리가 받은) +의 形像의 귀함과 主體性 떄문에 남과(/에게) (마무리, 원만히)적응하려면 (肉身(일)이 부딪치므로), 항상 生命을 잃는(自己를(自身을) 버려야 하는) 아픔과 안타까움에 맞닥드린다.(맞닥드리게 된다.) ◎끝
이런 것들의 總和는 [결국 할 일은] 自身의 生命을 잃는 것이다(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내가 아무 것도 못할(할 수 없을) 때에도 +께 맞게 하는 방법[길]이 있다. 卽,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다
자기를[자신을] 버리면, 和合을 위해 내 生命을 잃으면,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의 賞을 받을 것이다.
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 (우리 마음에는) 전체 모든 사람에게 하는 것과 똑같다. 이게 그렇다.
몸이 머니까(生의 길이 다르니까) 마음이 멀고(마음도 가까이 안하고) (+의 형상으로 (외부에서) 공급되야 할) 마음이 머니까 (사람의 기본적 욕구가 충족이 안되고) 괴로움이 가중된다.
주위 事物이 +이 만드심에 명백한 데도(새-깃털,울음, 날음 나무,꽃,(잎)-모양,향기) 귀하신 +의 형상을 自己(肉身)것으로 하여 (肉身 상태에서 主體性, 一貫性으로 밀고 나가고) 꼬장스런 영감같이 된다.
모든 사람의 協助體制를 만드는 것이 나의 目標이자 꿈이다 ((지금 (나의) 일도 여러(모든) 사람의 의견이 모아졌으면 바른 判斷을 하였으리라) ***(모든 사람의 和合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래야 좋은 결과를 오게 할 수 있다)
(나는 지금 겉으로는 남을 거슬르지 않으나(남과 싸우지는(부딪쳐 행하지는) 않으나) (내부적으로) 마음까지 즐거움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이 世上에서 生命을 잃는 것, 자기를 버리는 것-이것이 +의 계명[뜻]이다. 몸이 (특히,별로,一定히) 괴롭지 않은 때에도 앞의 일을 예상하고 마음이 괴로워진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 마음에 안든다. 그들이 다 자기만 위하는 것 같고 (그들이 다) 肉身의 싸움을 낳는다.(초래한다,가져온다.) (이런 일에 남에게 화내지 않으려면) 이 괴로움을 이기려면 (자기가 죽는, 자기를 버리는(버려야 하는))인내가 필요하다.
+의 뜻은 生命을 잃는 것이다.[/데(자기를(육신을) 버리는 데) 뜻이 있다]. 주체성, 일관성, +의 형상의 (고)귀함을 ‘나’로 주장하고 내세우려 하는 것 때문에 자기를 버려야 한다는 말을 못 받아들인다(모른다)
이것이(/자기를 버리는 것이) 왜 맞느냐 하면 客觀에 맞춰야 하며(모든 일을(어느 일이라도) 할 수 있으며) 客觀에 맞추는 일은 卽 肉身을 버리는 일이며, 썩을 육신을 버리고 영원한 +의 형상을(영을) 구하는 (거룩한, 고귀한, 고상한) 일이다. 또, 육신에 속하면, 사람이 대단히 나쁘게(악하게) 된다.
(즉 肉身을 버리고 罪를(罪惡짓는 것을,죄악에 빠지는 것을) 피해야 한다)
우리가 이 일[->자기를 버림으로 사람들의 協助體制를 더 鞏固히 하는 것]을 더 精密하게 하려 할 뿐이지, 즉 그렇다고 구원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즉, 완전히 몸까지 영까지 고통 나중해결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여러 사람의 의견은 정확하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서 現在일(나의 상황 일)에 대해 옳은 판단을 구한다. 그래도 판단을 옳게(객관에 맞게,좀더 낫게) 해서 그것으로 객관 일에(물리적 일에)성과를 더 있게 할 뿐이지 (영원한) 몸과 마음의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나의 일에 대해)
남과 싸우느니 차라리 즐겁게 남에게 양보하라. (그러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 내가 소멸하면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남과 감정적으로 싸우지는 말아야 한다. 그것은(감정과 영은) 모든 육체에 포괄되는 큰 (범위)것이고 영원까지 이르르는 무엇((영의) 생명)이다
그래야 이 몸이 죽더라도 +께 무엇을 (그래도) 기대할 수 있지 않느냐
사람 모인 곳에 가라. 그래야 내가 바로되고 정상화 되고 친구로 말미암아 위로가 된다. 또한 (내가 할 일, 현 상황 등에) (여러 사람 속에서 객관적) 좋은 판단을 얻을 수 있다. 의견을 들으면 (현재 (나의) 상황에 대해) 옳은 판단을 구할 수 있고, 의견을 못듣더라도 (다른 사람과 함께 함이) 나를 객관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혼란하고 어지러운(힘든, 쓰러질) 중에 내가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제대로 최상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무너지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버티게 한다 [최상의 판단->여러 사람의 의견(판단)대로]
이때 잘못하면(잘못될 때는) 주체성 일관성에서 하듯이 자기자신 마음주장(버팀,교만)에 빠지는 것(상황)이 된다.
상대방이 外的으로 아무 문제를 만들지 않으면 自己도 아무 문제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세상 일이 그렇다(이렇다).
世上도 (내게) 그러하니 나는 아무 말 말아야 돼. 世上에 대한 생각도 내 個人的인(主觀的인) 생각이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현재 내 위치에서 근심이나 세속에 빠진 싸움 고민 안하고 같은 상황에서 (편안히) 안달 안하고 가장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데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름으로(의견 길에 의한)) 가장 좋은 판단을 얻어내므로 가능하다.
(肉身을 버리는 방식)
이런 일을 한다고 구원 얻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단지 내가 (사는 동안) 활기차고 적극적으로 산다는 것뿐이다. 활동성 있게 살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은 것이다. 내가 일하는 게(ex. 공부,배드민턴,당구,연구 等) +이 바라시는 것이 아니므로 사람들과 화합있게 살면 내 일은 다한 것이다 [사람들과 화합있게-> (1)나를 주장 안하고 자기를 버림으로서, (2)여러 사람의 의견대로(의견따라) 객관에 맞게 하고 그것이 (모든 사람이 협조 되서)구원의 길이다]
일은 몸으로 해야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일이 되는 양상이 이렇다. 몸으로 된다. 그러니 상대방과 얽혀 근심하지 말고 몸으로 따로 일해 즐겁고 쾌활하게 하라.
+을 믿는(따르는,+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크나큰 (큰 절벽을 만나는, 시린) 괴로움이란 없다. 모든 일이(짐도, 노동도) 즐거움으로(가벼움으로) 온건하게(온난하게) 처리된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실제로 (큰 부딪침이나) 큰 일이 없다.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가는 것이 인생이로구나. 세월은 똑같은 양상이 되어 돌아오고…. 살아있는 동안 불안하기는 언제 어느 때나 똑같다.
내가 (能力이 限定되) 일은 못해도 사람들에게 協助한다.
내 주장하지 않고 (사람들 말을 들으며, 사람들을 따라서) 全體的 일이 돌아가게.
(3가지 생각)
(1) 세상이 흥미를 가질 만큼 커 보이지 않고 自己自身은 항상 自身속에 있다. ---(혹, 마음이 떨어지는(/비속한) 경우) 이렇고, 제일 (자신이라는 실체의) 밑바닥에 이렇다.
(2) +의 형상의 주체성, 일관성을 갖고 잘못하면, 세속화된 속에서 무기력, 자기 (마음)속에 갇힘, (목표없이 삶)(/인생의 미로에 갇힘)이 될 수 있다.
(3) 세상이 우리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그저) 끝이 난다….
◎
主體性과 一貫性과 +의 形像이 ‘나’인 것 때문에 내가 왜 ‘나’가 되어 存在하게(成立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에는 의문을(물음을) 갖지 않고, +의 형상의 ‘나’가 됨을 當然視 한다. (‘나’에 대해, 自身에 대해 當然視 한다).
그래서 주변에 널린 +이 만드신 손길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애 낳는 것(기적), 꽃(과 씨), 몸 구조와 臟器 및 기능, 유전자 모양 구조 等) ◎끝
[罪짓는 通路]
마음이 (둥둥 떠다니고) 定함이 없는데, 肉身을 놓지 않고 붙들려 하면 罪짓는 통로가 된다.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다소간 이런데 속하게 되고 마음이 엉키게 된다.
+의 형상의 ‘나’를 받은 것을 육신으로 대하며(낮은 동물적, 肉身으로 여기며) 곁눈질하여 빠끔히 주위를 보면 죄짓는 통로가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을 만드신 +이 우리를(모든 사람에 대해) 괴롭게, (邪)惡하게 괴롭게 하셨느냐?
우리는 어차피 세상에서 목숨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이 정하신 길이다. +은 (사람이) +에 대한 겸손을 보시는 것이다. (<參考>: +을(이웃을,義를) 위하여 생명을 잃을 때 高貴함이 있다.)
그러면 피할 수 없이, 우리가 얼핏 보기에는 짓궂게도((사)악하게도) (우리는 잘못한 것 없다고 생각되는데도)(+이) 주신 苦痛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 그리고 世界 모든 사람이 곳곳에서 各各 받는 苦痛에 대해 어떻게 解釋해야 할까?
+이 주시는 괴로움을 몸에 限定하고 마음에 까지 끌어들이지는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즉, 이웃((다른 외부)사람)에 대해 (일을 몸(의 일(,객관))에 한정하고) 화내거나 나쁜 감정으로 가지는 말아야 한다.
남에게 無視를 당하면 마음의 끈을 놓게 되고 어지러이 (마음이 방치되) 가(서) (육신만 (앞에) 상대되며) 죄를 짓게 된다. 영이 있으면 (영의 생명도 있고), 영의 생명도 지켜져야 되는 것 아닐까. 사람이 (남으로부터) 無視를 당하고는, 너무 無視를 당하고는 살 수 없다. 왜 이러할까?(그럴까)
우리가 (외부) 사람하고 만나면 내가 ‘나’로 當然視하는 것을, 남으로부터는 肉身뿐(으로 보여지고), 根本부터 물음을 갖게 만든다. 이래서 남은 나를 客觀, 즉 事實根據에 맞게 재보게 만들어 준다.
[너무 無視를 當하면 못사는(안되는) 이유]
우리가 세상 살면서 (피할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마음적으로) 많은 依支를 하고 산다. 그러한 (중요한) 다른 사람 앞에서 육체뿐으로(썩을 物體뿐으로) 돼서(그 앞에 만들어 지고) 죽으라는 신호만 온다면 아무 (+의 영으로 나아갈) 희망도 없고 마음이 (기능 못하고) 마비되게 된다.
(2014. 7. 7)
사람은 異常하게 한 사람에게 화내고 감정이 생기면(나빠지면) 모든 사람에게 화내고 감정이 생긴 것(나빠진 것)과 같아지고, 한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면 모든 사람에게 대해 사랑을 느끼는 것과 같아진다. 이것도 異常한 일이다.
(2014. 7. 7)
자기가 (몸뿐으로)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客觀에 맞추는 것이고, 卽 +을 아는 것이다. 즉, 最終的으로 갈 길이다. (내가 (宇宙에 비해 약하디 약한 몸뿐이고) 아무 힘이 없기 때문에 (또한,) 몸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힘들다.) (내가)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참을 뿐 화내거나 감정싸움 하지 않으며, 外部로 나가(卽 客觀世界에서) 남을 害하지 않으며,
또한, 아무 힘이 없는 내가 살고 있는 것은 그만큼 다른 누구의(外部의) 도움을 받아 살고 있음을 알아(알고) 現實의 事實關係를 깨닫는다. (우리는 무엇을 하려면 事實關係를 그르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이렇게)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알면 小小한 죄짓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2014. 7. 8)
+이 만드신 세계가 눈에 (명확히) 보이고, +이 (사람에게,우리에게) 잘못하지 않은 것이 느껴지면(이해되면), (+이 가깝고)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앞에서) 한가지로 여겨진다(보일 수 있다). (사는 것을 움켜쥐고 (+을 떠나) 그리로 피하지 않는다)
[-> +가까이 에덴동산 같은 느낌]
(2014. 7. 8)
몸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일하던 남이 일하던 (누군가는) 일해야 돼. (무엇인가는 일이 되야 돼.) 남 앞에서도 항상 일할 것이 앞에 놓여 있다.(조심,注意,삼가할 것이)
즉, 남들과 기분좋게 호기있는 관계로 살 수 없다(는 얘기.)
그러나 너무 (내가) 부담만 (앞에) 있어도 남이 좋아 안한다. 그러니 부담과 호기(豪氣,浩氣,好氣) 사이에 적정선을 찾는 것이 어렵다.
(2014. 7. 9)
(잘못될 때) (교만하게 나가) 몸 안에 것을 상대해야지 이미 몸 밖에 것을 상대한 거야.
왜냐, 사람은 +의 형상이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사람은 남에게 큰 영향을 받으니까.(그렇게 된다)
사람이 外部에 대해 이를 악물고 버티고, 밀고 당기고 하는 것은(질기게 대항하는 것은) +의 형상을 自己것으로 하기 때문.(‘나’의 고귀함을 自己것 같이 꼭 붙들고 안놓기 때문.)……(未)
+의 형상의 고귀함이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비천한 몸뿐이다.
일을 아예 안하면,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다. 우리가 일을 해도 주시는 것은 +의 몫이다.[세상의 自由意志, 非自由意志 문제를 이렇게 해석]
우리가 아무 힘이 없으므로 아무 것도 할 능력이 없다. 우리가 일한다고 무엇을 얻는 것은 아니다.(이루어 낼 수 없다.) 단지 活氣차고 活動性있게 살(그럼으로 짜릿하게 살아볼) 뿐이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게 그것뿐이다.) 활기있게 하는 그 기간동안 연구하고 무엇을 추구해서 한다. 그래서 (人生에서) 무엇이 或是 되면 多幸이고, 안되도 할 수 없는 것이다.
(2014. 7. 9)
活氣있게 살려면 사람들 모임에 가라.(사람들에게 engaged 되라.) 일하는(생산하는) 豫備모임에 가라. 거기서 기술을 연마하고 생산을 준비하라.
(motto 3가지)
1.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으므로) (사람을 만나며) 活氣있고 活動性있게 사는 것 이것뿐이다. (무엇을 바랄 수 있는 것이 없다.) (人生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다. 이것을 努力한다.
2. 남과(의) 관계에서 호기(豪氣,浩氣,好氣)있게 하는 것이 안된다. 하다가 틀려버린다. 그 정도도 行할 能力이 없다. 그러니 남과 아주 가깝게 (살갑게) (自由로이) 마음으로 가까워지지 못하고 담 쌓은 듯이 (항상) (떨어져) 살 수 밖에 없다.
3. 그리고 (몸이 있으므로) (남과 사이에) 내가 일하던 남이 일하던 누군가는 일해야 한다. 뭔가는 일이(노고,노력이) 되야 한다.
自己 혼자 하는 것보다 사람들과 씨름하는 것이 救援을 얻어. (‘다른 사람 목적에(지향점에) 맞는가?’에 따라 내 목적이 合해져 씨름함.) (能力있는 것인) 사람들에게 救援의 길이 있다.
이것이 物理的인 얘기고 거기다가 (남과 마음이) 접촉하고 연결될 때 高貴해진다.(高貴함을 느낀다.)
모든 사람의 救援을 求하는 게 +께 맞으니까 (그 目標로 가지면) 驕慢하지 않다.
(3가지 중요 要諦,생각,行動指針)
1. 사람들이 天國의(救援의) 열쇠이다.
(혼자 뭘 하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가서) 사람들과 씨름하는 게 救援얻는 길이다. 사람들의 능력을 組合해서 일할(모을) 수 있으므로.
***(사람이) 俗世에 파묻혀 머리박고 사는 것보다, 天國에 目標를 가지고 (平素) 살라.** 그러나 (나쁜) 남에게 當할 수는 없으므로 客觀에 맞춰 線을 그으며 살아야 한다.
2. 客觀에 맞추는 것이 중요. 이것은 卽 +을 아는 것과 同一함.
客觀에 맞추는 것은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낮추는 것 卽, +을 아는 것이다.) 크던 작던 生命을 잃어야 맞춰진다. (내가 누구의 (무슨) 도움을 받아 살고 있다는) 事實關係를 그르치지 말아야 한다.
客觀에 맞추면 사람들이 내게 나쁘게 할 때도 대응하는 方式이 된다. (일이 客觀으로 돌아가니까.)
3. (모든 것에서) +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본다.(‘내’가 어떻게 成立하게 되었는가 疑問 가짐-> +이 만드신 것들에 대해 理解)
+이 가까우시다. 사나 죽으나 (+안에서) 同一하다.
(사람이 금세 또, 분간 못하게) 잘못되기 쉬운 理由는
1) (+이 만들어 주셔서 成立된) ‘나’를 自己 것으로((當然한)所有로,任意로) over하기 쉽고
2) (肉體로 根據해서 말미암아 (現 삶을) 살므로) 肉身으로 살기 쉽다.
이 글의 目的은 +께 焦點을 맞추어 살고, 사람들에게 順한(淳,純) 생각을 갖도록(反感,對立感을 안 갖도록) 하기 위해. 내버린 채로 (生을) 살지 않고 사람들과 融和하도록. 즉, 사람들과 (싸우지 않고) 協助를 이루어 +나라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다. 모두의 救援 卽, +의 뜻에 맞게 하기 위해.
우리는 **(사람사이에)** 삶이 (안개같고) 어지럽고 분간 안될지라도 몸의 일이니까(몸으로 규정짓는 일이니까) 이 일이 맞다.(이렇게 행하는 게 맞다.)
사람은 다 (같다.) +의 형상으로 끝까지 같다. 그런데 싸움이 있느냐? 이는 육신에 속해서. +의 형상의 싸움이 아니라 육신끼리의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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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故가 날 때도, 그 前에 무슨 (평이한,편안한) 생각(,태도)을 가졌든지 죽으면 그뿐이다.(그 걸로 끝이다.) 죽음에 관해서는 人間이 (도저히) 넘을 수 없다. 그 後로 무슨 고통이 始作되는지 가늠할 수(도) 없다. 그래서 人間社會에 심한 苦痛과 歪曲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實際) 그 여파가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生을 어떻게 해석할지 문제가 우리는 答을 알 수 없다. (죽음의) 심한 苦痛쪽에서부터 해석할지, 平素의 평안함 온건함에서부터 해석할지 잘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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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24)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을 사랑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因하여 失足하지 아니하는 者는 福이 있도다‥” (마11:6)
사람을 만났을 때 느끼는 것이 +을 느끼는(보는,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육체)끼리 부딪칠 때도) 生命을 다해(버려,바쳐) 이웃을 위해야 한다. (+은 이것을 (사람에게서) 보시고자(찾고자) 하시는 것이다.)
죽을 때 自身이 謙遜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이것이 이렇다.) 죽을 때를 對備해서 (平素) 더 謙遜해야 한다. (죽을 때 +앞에서) 自身이 모든 것을 떠나보내고 아무 것도 없는데 평소에 잘못했었다. (내가 微生物과 동등하게 된다. 죽은 後에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잘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묶인다.((테두리 안에) 갇힌다.) (사람의) 外部는 언제나 너그럽고 포용한다.(平安하다.) 우리는 (잘못하는 이에 대해) 外部에서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
世上이 살지 못할 條件들로 가득하다. 내게 나쁘게 하는 사람도 있고 나와 안맞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억울해도 아무 말 못하고 (順하게(淳,純), 좋은 마음으로) 참아야 한다. 우리는 (아무 힘이 없기 때문에) 몸뿐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外部에) 빚지고 살기 때문에 (억울해도) (順한 마음으로(좋은 마음으로)) 참을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의 뜻이다.(뜻에 맞다.) 卽, 우리가 생명을 잃는(잃어 +을 아는) 것이 +의 뜻이다. (自己를(生命을) 버리는(버려 +을 아는) 것이 +의 뜻이다.)
일하는 게 사람사는 게 아니라 사람만나는 게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사람이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야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일 위주로 살면 사람이 견딜 수 없다. 사람과 관계를 위주로 살아야 한다. 일도 하고 사람도 만나야 된다. 그래야 사람이 바로(건강히,건전하게) 된다.
즐겁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붙이지도(접근,접촉도) 못해. 그 김에 나도 (사람 만남으로써, 우울해지지 않고) 즐겁게 사는 거야.
+께 焦點을 맞추고 거룩하고 高尙하게 살아야 하나, 우리가 肉體를 근거로 살므로 肉身에 屬한 행동이 자꾸 된다.
[結] (2014. 7. 31)
이웃을((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을 사랑하는 것이다. 世上이 (내가) 살지 못할 條件들로 가득하다. (내게 나쁘게 하는 사람도 있고, 내게 안맞는 사람도 많다.) (내가 도저히 容納 안되는 사람도 있다.(**많다.**))
우리가 (+의 뜻을 위하여) 生命을 잃는(自己를 버리는) 것이 +의 뜻이다.(길이다.)
◎自己가 +에 依해 죽을지라도(아플지라도) +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어디 쉬우냐. 이 말이 맞는 게 (이 말을 따르면) 肉身은(肉體는) 죽을지라도 實際로 영의 生命을 얻는다.
[이제까지 要約은] ‘살지 못할 몸을 주신 +을 사랑하라.’
이다. 사람이 몸이 사는 것(에 關心가지는 것) 말고도 할 일이 있다.(義務,責務,사랑 等.) (여기서 하는 말은) ‘그런 일을 하라.’이다.
사람이 어차피 누구나 (程度의 差異는 있으나) 살지 못할 몸을 받았다. 그 누구도 (永久히) 안죽지는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일이 되느냐가(일을 (맞게) 하느냐가) 重要한 것이다. [結]끝
사람은 肉體를(肉身을) 근거해서 살므로 (注意를 해도) 恒常 罪에(잘못된 (나쁜) 생각에) 빠지기 쉽다.
다른 사람과 겉으로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얘기해야지, 盟約하듯이 (파고들어) (나를 던져) 심각하게 얘기하면 (나도 상처 입고 남에게도 과도히 나가 상처주고) **(내가)** 함정에 빠져버린다.
自己는 몸이라, 몸의 位置以上 심각하게 하면 다 罪가 돼. (自己는 몸이라, 이리저리 쓸리는 몸이라, 몸以上을 (심각하게) (관계가지며) 하는 것이 부담돼.)
사람하고 너무 가까이 하는 것도 옳지 않다. 自己가 (能力가진) 마음인 체 하며 사람에게 가까이 하면 實際와 다르므로 서로에게 傷處를(失敗하는 結果를) 준다.
잘못하는 사람은 +이 審判하실 것이다. +은 바보나 멍청이가 아니시다. (사람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든지 다 알고계시다.)
(2014. 8. 9)
世上에 내게 맞는 사람은(이란) 아무도 없다. 모두 다 삐뚤빼뚤 (나와) 틀려있다. 그래서 (그에 대해) 내가 감정적으로 기분 나빠하기 쉬우나, 내 一方的으로 볼 수는 없고, 客觀이 돌아가는 대로 評價해야(봐야) 한다. 일은 客觀대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내 일과 내 位置, 各사람의 位置는 客觀이(實際 일이) 評價해줄 것이다.) &실제 일이 돌아감은 各사람이& 客觀에 얼마나 맞추고 안 맞추고가 평가해줄 것이다.(結果로서 나타내 준다.)
그러므로 그를(나와 (전혀) 맞지 않는 남이라 하더라도) 내 任意, 一方的으로 評價하면 안되는(실수하는) 것이다.
(實際 돌아감은) 客觀에 맞춰 일이 될 뿐이니까, (잘못하고 있는) 남이 안 변해도 좋다. 남이 뭘 변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 돌아가는) 客觀에 맞춰 내가 (먼저) 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도 이 어지러운, 난리같은 世上이 維持되고 있는 理由는 나를 먹여살리기 위해 누군가는 生命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묵묵히 일하는 그들에 의해 일이 充實히 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쁜 사람들과 다르게) 옳은 것을 주장하는 마음이 있다고 世上이 維持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갈 때의,行動할 때의)) 主體性, 一貫性, 主管性 때문에 (실제는 (몸뿐) 그게 아닌데), (잘못하여) (사람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와 同等하게 되려한다.
이 글의 目的은 (마음에) 世上이 엉킨(엉킨 채 살아가는) 것을 풀어주려 함. 그리하여 順하게(淳,純) 되도록.((세상을) 맞도록.)
(마음이 한가롭고) 餘裕롭고 便安해지지 못하고 마음이 왜 이리 (다)急해질까?
世俗에 엉키는 마음이 (자꾸) 드는 것을 떼어내지(어쩌지, 멀리하지) 못하겠다.
그 날에는 모든 것을 返納하고(世上에 남겨두고) (홀로이) (떠나) 가야한다.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各自가) 다 이렇다. 오직 +만 永遠하시다.
우리는 받은 몸뿐이고, 몸은 弱하고, 客觀을 그대로 두고 건드리지 못한다. 우리(各自)는 世上을 그대로 두고 (혼자) (조용히) 떠나가야 한다.(물러가야 한다.)
<參考>: 사람들을 和樂하게(ex. 물질적 공급,마음의 원활(,사랑),(사람사이에) 화내지 않음) 해주고, 나는 조용히 떠나는 것—-그것이 +의 뜻인 것 같다.
다른 사람과 싸우지는(미워하지는) 않더라도, 物理的으로는 사람을 모두 도둑놈으로 보라. ((萬若,) 도둑에게 自己 살 내어주려면 (그저) 베풀라.)
몸을(肉體를) 근거로 사는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서) 모두 도둑(놈)으로 보아야 한다. (사람은 (몸이 살기 위해)수치스러운 (肉慾의) 面이 다 있다.)
이 世上은 도둑사이의 秩序이다. 서로 害하는 도둑사이에서 버텨야(지켜야,이겨야) 살 수 있다. (이 生에서) 그냥 (自己를 내어주고) 죽을 수는 없지 않느냐. (***이 生에서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現實은 아니고 理想이다. 몸이 일단 죽으면 (그만이고,) 누가 그렇게 살겠느냐.***)
이 世上이 겉으로 선하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실제 있는) 그런 것(들)이 가려지고(/그에게서 (現在) 참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最終的으로는 남을 위해 犧牲하더라도 덧없이 죽을 수는 없지 않느냐.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몸을 지키고)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은 나만큼 너그러울 줄 몰라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도둑사이의 秩序를 세워야 한다. 몸을 根據로 살므로, 現實은 (서로) 도둑사이의 秩序이다. 그렇게 고상하게 사는 것도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이다. (***당장 죽을 수는 없지 않느냐.***) (+안에서는) 이 世上에서 사는 것이 全部는 아니지만(全部일 수도 있다.), 이렇게 하지 못하면 이 生에서 살 수 없다.
[重複] 몸(肉體,肉身)을 根據로 살므로, (몸이 살기 위해), (가리워 있을 뿐이지) 사람은 다 수치스러운 ((더러운) 肉慾의) 面이 있다. 그래서 이 世上은 서로 罪짓는 사람끼리의 秩序이다. 世上은 도둑놈사이의 秩序라고 보면 돼. 그 以上의 關係를 追求하지 말라. [重複]
사람은 自己가 일단 餘裕가 없으면(돈, 경제적) 남에게 마음껏 베풀지는 않는다.
모든 肉體를 가진 動物들이 다 이렇다. (제 몸이 살기 위해) 서로 도둑이 된다.(害한다.) 世上에서 善하고 좋은 사람을(관계를) 찾지 말라. 그런 사람은 없으니까.
(世上의 (理想的) 질서에 의해 目標를 두고 (사람과 관계를 가지며 때로 (사람에) 感謝하며) 살지만, 사람의 肉體的 現實은 서로 도둑 사이의 秩序이다.)
[結] (2014. 8. 19)
다른 사람과 싸우고는(담 쌓고는) 살 수 없다. 그러면 모든 게(나의 모든 일이(행위가)) 正常으로 안된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서는 견디기 어렵다.)
現生이 理想(的 세계)은 아니라 하더라도, 꼭 (이기적) 몸이 사는 것만으로 살 수는 없다.(없게 되 있다.) 現生的인 것을 떠나 (희생적) 理想的 행동을 해야 살 수 있게 되어(만들어져) 있다.
‘살지 못할 몸을 주신 +을 사랑하라’는 말은, ‘나를 살지 못하게 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과 같다.
나를 죽이시는 +께 하듯이 하면(살지 못할 몸을 주신 +을 사랑하라와 같이 하면) 世上에 (내게 나쁘게 하는,나를 살지 못하게 하는) 어느 누구와도 사귀지 못할(싸울, 담 쌓고 살) 사람이 없다.
내가 그렇게 善하게 하는데 (世上에) 어느 (惡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나쁘게 할 사람이 없다. 사람은(우리는) +이 우리에게 마음을(+의 형상,人格을) 주셨기 때문에 모든 것에 不拘하고 感謝하는 것이다.
죽을 때는 모든 것을 반납하고 가고[세상에 그대로 남겨두고 (홀로) 떠나며] 단지, +을 아는 것만(마음만) 남는다.(남아 +께로 간다.) 이것이[+을 아는 것(,마음)이] 잘못되면 죽을 때 갈 곳이(도) 없고, 賞도 받을 것이 없다. [結]끝
(사람들이 天國의(救援의) 열쇠인 理由)
1. 내 能力은 限定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社會)全體의) 能力은 一定하다.(하고 最上이다.) 個人의 限定된 능력으로는 일할 수(救援을 얻을 수) 없으나, (合치면 最上인) 사람들의 능력을 합쳐서 일을 하여 救援을 얻는 것이다.
2. 사람(들)과 함께하면 活力이 생기고 내 모든 것이 正常으로 되어진다.
3. 사람을 만남으로(접촉함으로) 고귀함을 느낀다.(하게 된다.)
救援얻는 길이 (내게는 없으나) 다른 사람들에게(의 能力에는) 있다. 사람 모인 곳에 가라.
**和意와 和合만 있으면 사람들이 (모여) (가장 큰,+이 주신 最上의 能力으로) 일을 이루어 낼 수 있다. 그러면 된 것이고 가장 좋은 結果를 바랄 수 있고, +도 이러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能力을 바라시는 것이다. 내 能力이 아니라 사람들 중에 있는 능력이, +이 인간에게 주신 世上 모든 문제,亂麻 등에 대한 解決策(그 길,열쇠)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주신) 救援의 열쇠이다. 육체적으로 나은 判斷과, 실제로 여러 사람 힘에 의한 (내가 못할 일에 대한) 도움을 받을 수가 있으며, 마음적으로도 親舊(慰勞)가 된다.
(아무리 (힘센) 큰 일을 한 사람도 개인적인 삶(面)을 보면, 누구나 다 적은 범위에서 (적게, 평범히, 小市民的으로) 살 수밖에 없는 理由) ***(그리고 그 누구도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그것이 全部이다.)
1) 그 누구도 自己몸 범위內에서 할 수 있는 것만 해야돼. 客觀(世界)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2) 그리고 그 누구든 ‘나를 살지 못하게 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와 같다.(같게 살아야 한다.) 남보다(그 누구보다도) 낮추어 살 수 밖에 없다.
(2014. 8. 24)
사람은 主體性 때문에 自己가 힘이 弱하다는 事實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또, +이 주위 (이)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만드신 것이라는) 事實도 잊어버린다. 그래서(그리고) 센 힘으로 하려하고 自己가 크고 제일 全部인 줄 안다.
또한, 그러나 힘이 弱하니까 ((世上의, 주위의) 센 힘에 依해) 괴로움도 받아야 된다.(生命이 눌린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2014. 8. 22)
살지 못할 몸을 주신 +을 사랑하라.
(일처리 잘못하면 여지없이 죽는다. 네가(내가) 산다는(살겠다는) 생각을 하지 마라.) (살지 못할 몸을 주셨어도 (사는 동안) 기본적으로 +의 형상을 주신(주어 누리게 하신) 것에 感謝하라.)
+이 살게 하시는 날까지 살다가 간다.
(2014. 8. 28)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以上 (다른 것을) 누리(려하)지 않는다. 밥 먹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으면 된거야. (남과 차별해) 내 固有일은 +의 나라를 求하는(얻으려고 努力하는) 데 있다. [모든 사람이 잘 사는 +의 나라]
(2014. 8. 29)
+나라는 淡淡하지(증류수, 淡淡, 淡白) 뭐 짙은 단물 같은 게 나오지 않아. +나라로 갈 때(떠나갈 때, 죽을 때) 淡淡하게 가라.(간다.)
(2014. 8. 30)
(+이) 살게 하시는 날까지 살다가 간다.(가는 것.)
네가(내가) 죽어도 +을 사랑하라.
나를 죽게(살지 못하게) 하는 +을 사랑하라.
結論은, 살지 못할 몸을 주신 +을 사랑하라.
(네가(내가) 산다는 생각을 버리라.)
어느 때고 결코 自慢하지 마라. 죽을 수 있는 (네가 알지 못하는) 萬가지 方法이 있다.
(2014. 9. 11)
우리가 (現)生에서 더 나아져도(뭐 잘될 때도) (느낌은 그대로구) 現在가(있던 것이) 시원하고 자연스러워지고 알차지는 것이지 뭐 별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즐거울 때나 善할 때나 不運을(나쁜 일을) 當할 때나 죽을 때도 이 (現在에서 느끼는) 느낌 그대로이다.
이와 같이 (무슨 일이 되건, 앞으로 더 가도) 나의 本質이 바뀌지는(변하지,달라지지) 않아. ((내가) 얼마나 시원하고 자연스럽고 알차지냐 이 差異만 난다.)
무슨 事故을 당해도(죽어도) (알지 못하고) 현재 느낌에서 그대로 간다.
(2014. 9. 17)
이것이 맞는 것은 (이제가지) 살아온 경험에서 안다. (事實, 무슨 (荒唐한, 되지 않는) 일이 닥쳐와도 (현재 느낌(나의 本質이) 그대로 일뿐) 우리는 막을 수가 없으나(그저 (바라)볼 뿐이나)), 살아서 황당한 일을 當하지 않도록 (다만) 合理를 추구할(하며 갈) 뿐이다.
사람은 生을 떠나(면) 微生物과 같아진다.(同等한 處地가 된다.) 그러므로 (평소) 다른 사람에게서 무슨 荒唐한(동물적인) 일이 올지 모른다. 그러므로 秩序잡힌 +의 世界를 보지 말고(에 맞추지 말고, 만큼 (내 位置를) 높아지지 말고) 動物, 無生物的으로 (내 位置를) 낮춰야 한다.
(2014. 9. 14)
‘事業報國’ - 내가 막연히 생각하는 +의 나라 (臨하게 함)보다 義務와 責任이 있다. (이 말(뜻)에는 國防의 의무도 있고 國家라면 (國家間) 싸움도 있다.) 내가 막연히 생각하는 것(+의 나라)보다 (더) whole thing, whole view이다. ‘나를 살지 못하게 하는 +을 사랑하라’와 脈이(때와 느낌이) 같다. (죽음을 각오하고 (그 앞에) 정신 (바짝, 自身을 바치고)차리는 분위기(느낌)). (肉體에 따른(,肉體가 있으므로)) 현실적 고민이 없는 게 아니라, 있는 게, (정말) +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事業報國’은 –할 일의 (처음부터의) 基礎 動因이 되고.-先制的으로 목표를 추구토록 (하게)하고 –은거하지 않고 많은 사람과 接해서(面對해서) 살게 한다.
社訓에 모든 것이(意味가) 있는 것 같다.
三星 李秉喆 會長 社訓- 事業報國, 人材第一, 合理追求
現代 鄭周永 會長 社訓- 勤勉, 儉素, 親愛
(2014. 9. 17)
일이란 사람들과 步調맞춰서(함께해서) 천천히 나아가면 돼. (일을 걱정하지 마라.)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나아가야)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않는 것이다.)(失手안한다.) (함께해서 천천히 나아가는 게(그게) 가장 잘되고 빠른 길이다.)
사람들은 나쁜 마음이 아니었고 괜찮은(보통,좋은) 마음이었다 생각해도, 내게 다 장애인들이다. 내 일에 맞출 줄을 모른다. 나와 관계된 일에 나를 (正確히 細細히) 돕지 못한다. 여기에 慾心(自己利益)까지 더해지면 世上의 싸움이 된다. cf.) (世上은 도둑들사이의 秩序)
(2014. 10. 15)
目標-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救援얻는 +의 나라를 求함.(求하기 위해 追求(노력함).)
(누구든지 그저 태어난 것뿐(이고),(그저 뜻없이 마구(많이) 난 것)), 基本的인 사람 自體에 意味(意義)가 없으니 世上에 무슨 일에(무슨 일을 한들, 누구를(사람을) (많이) 救한들) 意味가 있으랴.
어차피 (人生의) 最終 目標는(갈 길은) (내가 (,누가) 무엇을 하든, (어떻게 하든)) 사람들이 救援만 얻으면 되지 않느냐.
人生이 意味도 없고, 사람들을 評價할 수도 없고, 人生은 未解決로 끝나니...
결국 남는 것은 +을 알다가 가는 것.- 人生에 남는 것이(意義가) 그것밖에 없다. ‘그것’-[(허허하며 (부드럽게) +을 사람들과 함께하며,) +을 알다가 (이 世上을 떠나) 가는 것]
사람을 알아도, 아무 것도 못하는(할 수 없는) 사람[태어나서 生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보통 사람(일반 사람)]이 世上사람이지 무엇을 하는 사람이 世上사람이 아니다.
世上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부드러운 ((태도, 마음)인)) +을 알다가고(世上을 떠나가고), 그러니 허허거리며 (살아갈, 떠나갈) 갈 밖에.
부드럽고 便安할 때가 일도 (失手 없이, 정밀하게) 제일 잘된다.
(2014. 10. 17)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고 태어난 被造物的, 동물적인 것과 +의 마음을(人格을) 느끼는 +의 형상(+의 모습), 이 두 가지가 絶妙하게 組合(,連結,하나로)되 있다.
+을 알다가 가는데 (各 (固有))사람 많은 게 무슨 상관이냐? (누구에게나 똑같이 있는 +의 모습(형상)이다.)
客觀에 맞추는 것- (世上에,世界에) 있는 그대로 변형하지 않고 맞추는 것.(따르는 것.)
肉身에 속해서 나빠지는 그런 경우에는 肉身에서 먹는 것같이 되는(그런 성격의) ‘나’임. 육체에 살다보면 ‘나’를 갖춤(/가짐)自體가 肉身에 속함이 (되는 경우가) 된다.
(2014. 10. 20)
[重複] 이와 같이 우리 속에 아무 것도 모르고 태어난 것과(無生物的, 마구(자꾸) 태어난 것과), +의 모습(형상)(의(에 依한) 生活(모습)) 이 두 가지가 絶妙하게 같이 들어있는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 많아도 現在있는 사람에게서 느끼는 것이 全部이고(것과 同一하고) 모든 사람에게 同一한 것이다. 지금((사람의)본질)과 다른 사람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便安하게 (남의) 종이 될 수 있어야 成功한다. 내 속에 계신 +을 + 그대로 섬겨야 한다. 우리는 (本質로 보면) 無生物밖에 안되는 것이다. 우리 (사람들) 가운데 계시고 내 속에 계신, +의 형상((사람들의) 본질, (사람들의) 外樣, 公用으로 通하는 +의 형상 속에서)에 종이 되어야 한다. +의 종이 되려면(+을 제대로 (제 속에서) 섬긴다는 얘기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cf.)(사람은 모든 일에 客觀에(있는 事實 그대로에, 物質 客觀世界에) 맞추어야 한다.-이것이 진리이다.)
客觀에 맞추려다 보면, 나는 無生物이고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無生物인 내가 겸손하여져서) 내 속에 있고 여러 사람 속에 通해 있는(通用되는) +의 모습을 섬겨야 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있다고 느낄 때, 周圍 客觀에 그대로 따르지(맞추어 行하지) 않는 驕慢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生 自體가 +을(+의 모습(/人格))을 意味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나의) 本質부터(/기초, 아주 本質 밑바닥부터) 謙遜하지 않으면, +을 알기(/믿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한편, 몸을 가지고 (몸에 根據해) 生을 유지하므로 (우리 속에 받은) +의 형상이 肉身의(에서) 먹음같이 低劣해질 수 있다. 그리고 肉身性이 +의 형상과 결부되 主體性, 一貫性의 고집속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옹고집으로 世上과 남에게 대응하게 된다.(되기 쉽다.)
종이 된다는 것을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 속에 通用되는 +의 형상에 의해(사람들의 움직임에 의해) 내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일들이 決定되고 거기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남의) 종이 된다는 얘기는 實際 그로 인해 내가 죽을 수도 있는(있다는 사실을 甘受해야 하는) 것이다.
남의 종이 되면 남이 끼어들어 (내게 와서) 내 일을 도와준다.(협조한다.) 世上일이 이렇게 되는(이루어지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일하는 게 아니라, 便安하게 남의 종이 되야 (그래야) 成功하는 것이다. 즉 (世上 모든 일에 있어) +께(+의 形像(/人格)에) 잘해야 成功하는 것이고, 내가 무엇을 하는가는 重要하지 않다. 그것이 그 어떤 일이든 이루기 위해, 할 일의 全部이다. 그것으로 할 일은 다인 것이다. 卽, 世上에 通해 (일이) 되는 +의 형상에 나는 無生物밖에 안된다. 그러니 自身을 낮추라.
+의 형상을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低劣한 것으로 갖던지, 일단 ‘나’가 成立되어 버리면 (내가 내) 밖에서 나를 쳐다보지는 못한다. (내) ‘나’가 完成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外部에) 있는 그대로, 事實 그대로 해야 한다. 즉, 客觀(客觀世界)에 맞춰야 한다. 내가 (外部에) 아무 主張이나 움직임을 할 수 없다면, 나는 無生物 存在位置와 같다.